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테레지아 (문단 편집) == 결혼 이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Maria Theresia of Australia.jpg|width=100%]]}}}|| || 10~11세 때 그려진 초상화.[* [[http://en.wikipedia.org/wiki/File:Andreas_Moeller_001.jpg|그림 설명]]. 허리가 말도 안 되게 가는 건 [[코르셋]] 때문이다.] ||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이 가문은 [[벨프 가문|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으로도 알려진 [[하노버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 주로 하노버 왕조 영국이나 [[호엔촐레른 가문]]과 통혼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이종사촌이고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독일.폴란드 원정]]의 프로이센 지휘관)과 테레지아는 5촌이다.][* 왜 신교도 가문과 카를 6세가 결혼했는지 궁금하다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항목 참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도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와 마찬가지로 근친혼이 만만치 않았으나 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와 아버지 카를 6세 덕분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친혼이 제법 희석된 편이었다.]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럽 최고 왕가의 빼어난 미모를 가진 황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카를 6세는 일찍이 즉위 초에 딸도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국사조칙]][* 국사조칙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책봉하고 나서가 아니라 첫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공표한 것이다. 1713년에 공표했으므로 1717년 태어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혜를 받았을 뿐, 애초에 딸에게 상속할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으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성하고 나서도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 했다'''. 국사조칙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 6세]] 항목 참조할 것.]을 내렸고 주변 국가들도 이를 승인했다. 이후 태어난 외아들이자 장남이 일찍 죽은 데다 딸만 내리 셋을 낳는 바람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